선전(심천)에서의 하룻밤은 짧았다. 새벽 일찍 하얏트 리젠시를 나서며 익스프레스 체크아웃 함에 카드키를 밀어 넣었다. 리장(Lijiang)행 국내선을 타기 위해 수속을 밟던 중,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여행의 첫 번째 제동이 걸렸다. 보안 검색대에서 직원이 나를 불러 세운 것이다. 원인은 바로 '보조배터리'였다.
중국 공항의 보조배터리 규정이 엄격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나름 철저하게 대비하고자 여행 전 공식 홈페이지에서 용량에 맞는 보조배터리를 새로 주문해 챙겨갔건만, 직원은 배터리 표면의 인증 마크를 문제 삼았다. 중국의 국가 규격인 CCC 마크가 없고 한국의 KC 마크만 찍혀 있다는 것, 그리고 표면의 용량(Wh) 표기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압수를 통보했다.
더 억울한 사실은 바로 옆 줄에서 검색을 받은 아내의 보조배터리는 무사히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항의할까 고민했지만, 행여나 깐깐한 직원에게 아내의 배터리마저 빼앗길까 봐 눈치를 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여행 내내 구글맵과 번역기, 택시 어플을 돌려야 하는데, 배터리 하나로 버텨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씁쓸한 '배터리와의 전쟁'은, 여행 전의 완벽한 준비도 현지 보안 직원의 재량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 있다는 뼈저린 교훈을 남겼다.
선전과는 다른 온도, 나시족의 땅
다시 중국남방항공에 올라 다행히 연착 없이 리장 산이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비행기 문을 나서는 순간, 불과 몇 시간 전 선전에서 겪었던 끈적한 아열대의 공기는 온데간데없고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반팔 차림이었던 나는 황급히 가방에서 긴팔 겉옷을 꺼내 입었다. 같은 국가 안에서 이토록 극명한 온도 차를 겪으니 비로소 해발 2,400m의 윈난성 고원 지대에 도착했음이 실감 났다.
리장 공항은 첫인상부터 퍽 이채로웠다. 전형적인 현대식 공항 건물이 아니라, 리장 특유의 흑회색 기와지붕이 겹겹이 얹힌 전통 고택 양식으로 지어져 있어 이 지역만의 고즈넉한 멋을 진하게 풍겼다. 이 독특한 건축 양식은 리장의 원주민인 나시족(Naxi)의 전통을 반영한 것이었다.
멋진 외관과 별개로 공항을 빠져나오며 마주한 현실의 풍경은 선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화장실의 위생 상태는 여행자를 긴장시켰고, 어디서든 뿜어져 나오는 자욱한 담배 냄새와 길거리 흡연은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이 거대한 대륙의 압도적인 스케일과 매력적인 문화 속에서, 화장실과 흡연 문화만큼은 여행 내내 감수해야 할 유일한 걸림돌처럼 느껴졌다.
디디 택시의 위력, 그리고 풀만 리장 리조트
공항을 나서 목적지인 '풀만 리장 리조트 앤 스파(Pullman Lijiang Resort and Spa)'로 가기 위해 택시를 호출했다. 지하철이 없는 도시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이어진 도로에는 내연기관차보다 전기차와 전동 스쿠터가 훨씬 더 많이 눈에 띄었다.
🚕 여행자의 노트: 바가지를 피하는 리장 택시 팁
중국 택시비가 저렴하다고는 하지만, 대표적인 관광지인 리장 공항이나 고성 주변에서는 외국인을 상대로 한 흥정이나 바가지요금이 빈번합니다. 따라서 반드시 알리페이에 연동된 '디디추싱(DiDi)' 어플을 이용해 호출해야 합니다. 디디를 이용하면 공항에서 수허고성 인근의 숙소까지 약 40분을 달려도 60~80위안(약 1만 원대 중반), 시내 단거리 이동은 10~20위안(약 2~4천 원)의 정찰제로 매우 안전하고 저렴하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리장에서 글로벌 체인 호텔을 찾는다면 위치에 따라 선택지가 나뉜다. 번화한 리장 고성(다옌고성) 내에 위치한 인터컨티넨탈, 옥룡설산 기슭에 자리한 최고급의 반얀트리, 그리고 한적한 수허고성(Shuhe Old Town) 바로 옆에 위치한 풀만 리조트다. 반얀트리는 훌륭하지만 가격이 부담스러웠고, 마침 내게 아코르 플래티넘 티어가 있어 접근성과 가성비가 모두 훌륭한 '풀만'을 최종 선택했다.
🏡 스테이 노트 : 풀만 리장 리조트 (Pullman Lijiang)
- ✓ 분위기와 경관: 나시족 전통 건축 양식이 돋보이는 프라이빗 리조트. 수허고성과 도보 거리에 있어 매우 조용합니다. 흐린 날씨 탓에 옥룡설산 뷰를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으나, 봄을 알리는 분홍빛 복숭아꽃과 벚꽃이 만개해 리조트 특유의 서정적인 감성을 더해주었습니다. 유명한 터줏대감 오리 가족도 만날 수 있습니다.
- ✓ 멤버십 혜택: 아코르 플래티넘 티어 혜택으로 일반 룸 업그레이드와 웰컴 기프트를 받았습니다. 일부 후기에서 보이는 단독 '빌라(Villa) 객실(자쿠지 포함)' 배정을 내심 기대했지만, 일반 객실과의 카테고리(가격) 차이가 워낙 커서 무상 업그레이드는 역시 무리였습니다.
- ✓ F&B (애프터눈 티): 숙박 기간 중 1회 제공되는 애프터눈 티 세트를 즐겼습니다. 커피의 풍미는 우리 입맛에 다소 낯설었지만 디저트는 훌륭했고, 특히 과일(수박)의 단맛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비 내리는 흑룡담 공원, 그리고 운설리
오전 11시경 호텔에 짐을 풀고 첫 일정으로 흑룡담 공원(Black Dragon Pool)으로 향했다. 호수 위로 그림처럼 반사되는 만년설 덮인 옥룡설산. 수많은 여행 잡지에서 보았던 바로 그 완벽한 절경을 두 눈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추적추적 비를 뿌렸다. 짙은 구름에 갇혀 옥룡설산은 형체조차 보이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호숫가를 걷고 있을 때, 어디선가 귀여운 청설모 한 마리가 쪼르르 다가와 우리를 반겼다. 아쉬움을 달래준 작은 위로였다. 날이 개면 꼭 다시 오리라 다짐했지만, 빡빡한 여행 일정 속에서 '다음'이란 늘 기약 없는 약속임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흑룡담 공원에서 번화한 리장 고성까지는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비를 맞으며 고성에 진입하자마자 헛헛함에 허기가 밀려왔다. 중국 특유의 강한 향신료 냄새에 지레 겁을 먹고 있던 터라, 첫 끼니만큼은 안전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 한국인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고, 중국 맛집 어플인 메이투안(Meituan)에서도 평점 4.5에 후기가 압도적으로 많은 식당 '운설리(Yunxueli)'로 향했다.
🍽️ 실패 없는 미식, 운설리
한국인 블로거들이 추천하는 일명 '국룰 메뉴'들을 그대로 주문했습니다. 향신료에 대한 두려움이 무색할 만큼 한국인 입맛에 아주 잘 맞았습니다. 중국 음식 초심자라면 고성 내에서 가장 믿고 갈 만한 안전한 식당입니다.
🍻 샹그릴라(Shangri-La) 맥주
식사에 곁들인 이 로컬 맥주는 정말 최고였습니다. (💡 덧붙이는 이야기: 샹그릴라 맥주는 티베트 고원의 청정수와 고지대 보리를 베이스로 양조하여, 일반 라거보다 목 넘김이 훨씬 부드럽고 쌉싸름하면서도 향긋한 풍미가 특징인 윈난성의 대표 크래프트 비어입니다.)
화려한 고성의 야경, 마라 꼬치, 그리고 통증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니 비로소 고성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내린 리장 고성은 수백 개의 홍등이 켜지며 낮과는 완전히 다른 화려한 생기를 뿜어냈다. 좁은 골목마다 라이브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고, 거리의 사람들은 낭만에 흠뻑 취해 있었다.
우리는 수집품인 여행지 마그넷을 사기 위해 상점들을 기웃거렸다. 나시족 고유의 상형문자인 '둥바(동파) 문자'가 새겨진 마그넷을 열심히 찾았지만, 어째서인지 눈에 잘 띄지 않아 아쉬웠다. 발길은 자연스레 고성 외곽의 충의시장(Zhongyi Market) 야시장으로 향했다.
야시장에는 낯선 과일과 각종 먹거리가 넘쳐났다. 소통이 되지 않아 손짓 발짓으로 이름 모를 꼬치 구이를 주문했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강렬한 마라 향이 입안을 강타했다. 평소 한국에서는 마라 맛을 즐겨 찾는 편이 아니었는데도, 현지에서 맛본 그 꼬치의 자극적이고 확고한 맛은 지금 글을 쓰면서도 침이 고일 만큼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낭만적인 고성의 돌담길이 내 허리를 공격할 줄은 몰랐다."
밤이 깊어질수록 감성과 비례하여 몸의 피로도 쌓여갔다. 문제는 리장 고성 특유의 울퉁불퉁한 돌담길(석판로)이었다. 캐리어를 끌기도 힘든 이 거친 돌길을 하루 종일 걷다 보니, 아내와 나 둘 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지다가도, 고성의 돌담길만 밟으면 귀신같이 허리 통증이 재발했다.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가장 큰 적은 비도, 향신료도 아닌 내 체력이었다.
그렇게 욱신거리는 허리를 두드리며 리장에서의 첫날밤이 저물었다. 맑은 날씨 아래 빛나는 옥룡설산을 보지 못해 짙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빗속의 고즈넉한 고성과 강렬했던 마라 꼬치의 향기는 리장이란 도시를 내 기억 속에 아주 선명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내일은 구름이 걷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았다.